■ 대중문화 속의 의료기기 이야기 - 9회

■ 대중문화 속의 의료기기 이야기 - 9회

여자의 변신은 무죄? 필립스의 변신도 무죄! (Part 2.)

▲임 수 섭
LSM 인증 교육원 대표/
여주대학교 교수

30년 가까이 소위 의료기기 영상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GPS(GE, Philips, Siemens)의 일원이기는 했으나, 만년 3등 포지션으로 고착화됐던 구도를 타개시킨 필립스의 서커 펀치(Sucker Punch)가 2000년 중반에 작렬했으니, 필립스가 우리나라 MRI 3.0T 시장을 석권한 사건이다. 

당시 MRI는 1.5T 시장이 주력이었으나, 고해상도의 3.0T에 대한 시장의 요구가 증대하고 있었다. 문제는 당시 3.0T 제품이 소프트웨어나 촬영 기법 등에서 다양한 기능이 적었고, 영상이 양 측면으로 갈수록 화면 왜곡이 생겨, 상용화된 시야각(Field Of View, 이하 FOV)이 좁았다. 이 때문에 기존의 명성을 등에 업고 시장에 조기 진입한 GE와 지멘스의 3.0T 제품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3.0T는 아직 이르다는 편견이 의료기기 영상 시장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필립스는 넓은 FOV가 필요하지 않는 반면, 보다 세밀한 영상을 요구하는 뇌 조직, 뇌혈관, 심혈관 및 신경 촬영 등에 강점을 가진 제품 출시와 이에 특화된 마케팅 전략을 씀으로써 국내 유수 대형 병원의 3.0T 프로젝트를 휩쓸게 된다.

이를 통해 2004년까지 GPS 3사 중 3위에 머물렀던 필립스가 2005년 지멘스를 제치고 2위에 오르게 된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캐시 카우인 Angio 시스템과 초음파영상진단장치가 수위를 지키고, 기존 초열세 영역인 CT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면서 전체 매출도 급상승하게 된다(2005년 약 $57,471,000 → 2006년 약 $81,799,000 → 2007년 약 $93,879,000, 이하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수입실적보고 기준). 그 결과 필립스는 GE마저 제침으로써 마침내 GPS 중에서 선두에 오르게 된다. 특히 2007년도는 GPS 3사 중 1위에 오른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입 시장 전체에서 2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필립스에게 남달랐다. 

하지만 GE, 지멘스를 포함한 영상진단 의료기기업계 전체에도 의미가 컸는데, 앞서 말한 필립스의 새로운 시장 접근과 성공을 손 놓고 보고 있을 GE와 지멘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이 둘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 복지 국가 정책과 경제 성장에 따른 보건복지 수요 증가, 건강 보험 대상 확대 등이 맞물리면서 필립스, GE, 지멘스의 매출이 동반 성장함으로써 3사 모두 2005년~2008년 기간 동안 국내 의료기기 수입 시장에서 5위 안에 들게 됐다. 심지어 2006년, 2007년 2년간은 GPS 3사가 2~4위를 나란히 독식하는 현상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특히 이렇게 치열한 경쟁의 정점을 찍은 2007년에는 필립스-GE-지멘스가 각각 약 $93,879,000, 약 $93,492,000, 약 $91,856,000이라는 드라마 같은 초박빙의 승부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이후 프리미엄 성능-가격을 내세운 지멘스와 가성비와 함께 금융 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한 GE의 반격으로 혼전 양상을 띠게 됐고, 2010년대 중반 이후에는 MRI-CT-Angio 시스템 모두에서 고르게 1~2위를 차지한 지멘스가 독주에 가까운 수위를 차지함으로써 다시 GPS의 순위가 바뀌게 됐다. 심지어 지멘스의 경우, 2010년에 존슨앤드존슨, 메드트로닉 같은 의료용품 시장의 초강자까지 제침으로써 의료기기 영상 업계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왔던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입 시장 전체 1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어느 기간보다도 치열했던 2000년대 중후반의 'GPS 대전' 이후, 필립스의 위상은 과거처럼 더 이상 만년 3위가 아닌, 언제라도 1위를 넘볼 수 있는 의료영상장비와 환자 관리 시스템의 초강자 포지션을 차지하게 됐다. 이를 공고하게 해주는 것이 앞서 말한 'Health Continuum' 콘셉트이다. 고급 가전 명가의 전통을 살려 구강건강 솔루션, 육아용품, 통증완화 제품, 생활가전, 남성 그루밍과 뷰티 등 건강한 생활을 위한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퍼스널 케어 사업과 병원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수면무호흡 진단과 치료 솔루션, 비침습적 인공호흡기, 산소발생기, 기침 유발기 등을 제공하는 수면 및 호흡기 질환 사업은 B2B에 치우치고 가전 사업이 없는 GE에 대한 전방위적 대응책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영상장비 등 의료기기뿐만 아니라 중환자실, 응급실, 병동 등 병원 내 여러 중앙 감시 시스템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의료진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에서 플랫폼이 연동되게 하는 데이터 수집 플랫폼을 구축함으로써, 병원 운영, 의료진 내 소통, 환자 관리 및 치료의 효율성을 높이고 시간과 비용은 줄이는 스마트 병원 구축을 가능케 하는 '커넥티드 모니터링 솔루션'과 '데이터 통합 관리 솔루션'을 제공했다. 이는 유사 솔루션이 영상장비와 진단장비에 치우친 지멘스에 대한 대항마다.

이뿐만 아니라 헬스케어 제품을 중심으로 한 필립스 내의 다른 사업 부문과의 통합된 솔루션도 제시했는데, 먼저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 가전 사업' 제품을 건강관리에 초점을 맞춘 제품으로 정렬함으로써 이들 제품 하나하나를 향후 스마트 헬스케어의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핸드핼드(Hand-Held) 기기, 웨어러블 기기, 센서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확장성을 구축했다.

또한 비록 비중을 줄였지만 여전히 활발하게 사업을 유지하고 있는 조명 사업 부문과 통합 솔루션을 구축해 환자뿐만 아니라 의료진에게도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심신 안정과 활기를 줄 수 있는 조도, 색상, 파장과 디자인이 결합된 조명(Luminous Textile)을 병원에 공급하거나, 미세한 심혈관, 뇌혈관 수술에 사용되는 혈관조영엑스선촬영장치에 적합한 음영이 없고 조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조명, MRI나 PET-CT 촬영 시 폐쇄공포증을 완화시키고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천정에 부착된 모자이크-파노라마-멀티큐브 조명, 그리고 우울증을 완화시키고 숙면, 수면시간 및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병실 전용 조명(HealWell) 등을 제공함으로써 사업부 간 협업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변신뿐만 아니라, 상대가 가지지 않은 자사의 다른 사업부의 제품 기술을 조합해 새로운 솔루션을 제공함으로써 작은 변화까지 크게 아우르는 필립스의 행보는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Let’s Make Things Better)'는 예전의 필립스 마케팅 캐치프레이즈에 딱 들어맞는 의료 산업 접근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의료기기뉴스라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