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씨피메드 국내 심장순환계 의료 발전과 협회 설립에 공헌

■ ㈜케이씨피메드-최춘섭 회장(협회 3대 회장)

“경영인의 삶에서 젊은 예술인의 꿈을 응원”

㈜케이씨피메드 최춘섭 회장은 45여년 동안 국내 의료기술 및 국민 보건 향상에 이바지 했으며, 의료기기산업계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설립에 공헌하고 3대 회장이 되면서 협회 성장의 토대를 다졌다. 지금은 경영인의 일에서 잠시 놓아두고 CHAPTERⅡ(챕터투)라는 갤러리를 지난해 11월 회사 사옥 1층을 보수해 공간을 마련해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고 있다. 케이씨피메드 최춘섭 회장을 만나 그간의 인생 여정을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국내 의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의료기기와의 인연은?

㈜케이씨피메드, 최춘섭 회장(협회 3대 회장)

옛날에 전자기기 대리점을 했다. 75년도에 폴라로이드(즉석필름)를 취급했는데, 77년 한국에 처음 CT가 들어왔다. 경희대병원에 설치됐는데 당시 CT를 찍을 때 무조건 폴라로이드필름으로만 현상을 했다. 바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경희대병원은 CT를 가져다 놓고 쇼윈도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밖에서 CT 촬영하는 모습이 보이도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병원홍보전략이었다. CT가 최첨단기기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필름을 납품하면서 의료기기를 알게 되고, 점차 심장순환기제품만 전문으로 한참 매진했다. 보스턴사이언티픽, 메드트로닉이 협력 회사였다.

새로운 의료기기를 도입하며 크게 회사가 번창했는데?

1985년에 케이씨피메드를 설립하고 변화하는 의료계 환경에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당시 세계 시장에서 페이스메이커를 가장 선두적인 위치에서 개발, 판매하고 있었던 다국적 기업인 인터메딕스 인터내셔날사를 한국 시장에 소개했었다. 심장순환계 의사들이 인정하는 부분은 소아심장에 쓰이는 의료기기를 참 외롭게 끌고 왔다. 돈을 떠나서 의료의 질을 개선하고 환자를 위해 지금까지 최선의 노력을 해왔다. 또 주 품목인 심장순환계통에서 영역을 확장해 마취과, 응급의학과 제품도 취급했다. 88년도에 응급의학이 처음 생길 때는 우리 회사에서 많은 서포트를 했다.

지금까지 기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에 폴라로이드를 들고 병원을 들락날락하다가 나중에 중심정맥압(CVP) 제품을 하면서 전 병원에 들어가는 소모품을 시작했다. 제2의 창업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성장해 본격적으로 메디칼사업을 진행했다. 지금까지 42년 됐다. 보통 조금이라도 의료계통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의료기기업체를 운영하기 시작하지만, 나는 33세에 처음 사장으로서 개업해 통관, 세관을 찾아다니면서 일했다. 열정이 있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의료기기업을 한다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일해 왔다.

케이씨피메드를 거쳐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4~50여명 된다. 우리회사가 창업훈련소 역할을 했다.

직원단체 해외 여행을 매년 가는 이유는?

소모품 영업은 각자 담당 병원 선생님을 매일 같이 만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 좋은 기운을 가지고 고객을 만나야 한다. 스트레스에 강한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견디다 보면 고객도 직원도 회사도 손해가 된다. 힘들면 쉬기도 해야 한다. 그걸 회사에서 해 줄 뿐이다. 일하는 사람이 즐겁게 보상이 필요한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도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고 우리 직원들도 스트레스를 항시 달고 다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원들과 매년 해외여행을 간다. 그리고 회사에 카페도 만들고, 근래에 와서는 미술에 관심이 있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갤러리도 운영하고 있다. 카페에서 회장하고 만나도 어려워하지 말고 앉아서 이야기 하고 가볍게 와인으로 술 한 잔 마시며 여유도 챙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협회 설립 멤버로 그리고 3대 회장으로서 협회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는데?

사실 협회를 바라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의 전신은 의료기기수입업협회이다. 지금은 제조사, 수입사, 다국적 기업 등 협회의 지붕 아래 모여 회원사 권익을 보호하고 의료기기 법령·제도 등을 개선하고 만들어 가는 것을 볼 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전 코비디엔 김희정 대표, 전 메디언스 전영철 부회장 등의 젊은 그룹과 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디케이메디칼솔루션 이창규 회장 등 여러 업계 분들이 모여 이심전심의 힘으로 협회가 생겨났고 내가 회장일 때 처음으로 의료기기법을 만들게 됐다. 법이 마련되면서 의료기기산업이 더욱 가파르게 성장해 나갔다.

의료기기산업 발전을 위해 화합에 집중했는데?

엄청난 노력을 했다. 사단법인으로 하고 보니 산업 입장에서 수입업협회로는 한계가 분명있었다. 그래서 협회 이창규 초대회장을 위시로 반대편에 있던 제조사 단체인 조합과 통합을 추진했다. 많은 회의를 했다. 결론적으로 이창규 초대회장이 회장을 양보하고서라도 통합을 희망했다. 그러나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는 협회 회원사의 반 가까이가 제조사라 들었다. 그리고 협회 이사회의 반이 제조사 임원이고 협회 설립의 본연의 목적을 실천해 가는 것 같아 보기 좋다.

3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임기를 3년으로 정했다. 일 잘한 사람은 연임도 가능하게 했다. 그런 후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이 신문을 만들었다. 신문을 창간할 때 힘들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회원사 권익을 대변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려면 신문이 필요했다.

회사 1층 로비에 인상적인 그림이 걸려 있는 걸 봤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꿈을 키우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들었다.

지난해 11월 젊은 미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공간으로 CHAPTERⅡ(챕터투)를 마련했다. 기업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학과과정을 마치고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젊은 미술가들에게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빌려주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지역주민들, 회사를 방문하는 사람 등 문화 예술을 좀더 편하게 감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추진됐다. 그전에 줄곧 그림 수집만 수백점 해오다가 미술에 대한 갈망이 있어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이론적으로 배우기도 했다. 홍익대에선 평생 학생증을 주기도 했다.

현재 두 명의 젊은 작가들이 입주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데 예술가로서 나래를 힘껏 펼치기를 바라고 챕터투를 통해 미술인들이 폭넓은 교류와 예술이 융성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입주 젊은 작가는 여기를 나갈 때 캔버스 100호 크기의 그림을 그려줘야 한다. 100호 그림은 열심히 하라는 동기라 할까, 실력을 쌓지 않으면 쉽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협회에 한 말씀 전한다면?

협회가 커질수록 나를 낮추고 조심해야 한다. 회원사가 협회에 들어왔을 때 내 집에 온 것 같은 편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관료화 되는 걸 경계하고 회원사 위에 군림하는 걸 멀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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